운명이라는 환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우리가 정체성이란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이용하여 세상을 이롭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노벨경제상을 수상한 경제학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다분히 논설적인 책이라서, 미력한 지성의 내가 함부로 옮겼다가는
이 책논지에 대한 왜곡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래에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출판사 서평을 옮겨 놓는 것이 좋겠다.
단,
개인적으로 참으로 후련하고 통쾌했던 본문의 일부를 옮겨보기로 한다.
이 구절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p. 061 ~ 062
수많은 근대 경제학자들은 편협하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을 가정하는 것을 명백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 듯 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합리성을 기하려면 이러한 추정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이는 상당히 일반화된 주장이다) 그 이상함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접하게 되는 논증이 하나 있는데(일부에서는 이 논증이야말로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은 질문 형식을 취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왜 그 일을 하려 했겠는가?" 이렇게 잘난 체 하는 회의주의는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다양한 동기들과, 사람들의 다채로운 소속 관계 및 참여 관계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럼으로써 모한다스 간디 Mohandas Gandhi 1869-1948 와 마틴 루서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 1910-1997,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재임 1994-1999 를 어마어마한 바보로 만들었으며, 그 밖의 우리들은 작은 바보들로 만들었다. 오로지 자기애自己愛에만 충실한 인간은 수많은 경제 이론에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토대를 제공하면서, 이른바 "경제인economic man" 또는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gent"와 같이 명명됨으로써 자주 미화되어 왔다.
<출판사 서평>
“야만적으로 조작된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신작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수단 등 오늘날 전 세계에 걸친 종파적 폭력의 근저에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적 혼동이 있다. 이러한 세계적 갈등과 폭력은 인간에게는 선택 불가능한 하나의 독보적 정체성이 있다는 환영과 숙명론에 의해 유지된다. 자신이나 타인을 종교나 민족, 문명 등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만 의거해 바라볼 때,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는 끔찍하게 축소되고 만다. 아마르티아 센은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적 세계화와 종교 근본주의, 테러리즘, 정치적 다문화주의, 역사적 탈식민주의 등 기존의 주제들을 재검토하고 재평가한다.
정체성의 낙인은 위험하다!
#1 후생경제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이 몇 해 전 겪은 일이다.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이던 센은 해외여행을 마치고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받던 중 출입국 관리소 직원에게 질문을 받았다. 여권 주소란에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 관사의 주소가 적힌 걸 본 직원은 센에게 ‘학장의 친구’인지 물었던 것. 자신에게 ‘자신의 친구’냐고 물은 셈이 되어 당황한 센이 잠시 머뭇거리자 직원은 영국에서 어떤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센에게 묻기 시작했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은 인도 벵골 출신이었던 센이 케임브리지의 대학 학장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2 지난여름(2009년 7월)에는 ‘하버드 흑인교수 체포…… 인종 차별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잠시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케임브리지에서 한 여성으로부터 “한 남성이 어느 집 문을 어깨로 밀면서 열려고 하고 있다”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체포한 이는 하버드대 (흑인) 교수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Henry Louis Gates)였다. 게이츠가 면허증과 교수증을 제시하며 그 집이 “자신의 집”이라며 항변했음에도 경찰이 체포하자,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적인 검문·수색이라며 사회적인 비난이 일었다.
두 경우 모두 피부색에 따라 타인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거기에 유색인이나 외국인을 불법 체류나 범죄와 연관시키는 고정관념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영국 공항 직원이나 미국 경찰은 이때 당사자들의 신분을 보여주는 다른 ‘정체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출신지나 피부색만이 그 사람의 유일한 정체성인 것으로 여겼다(이들이 만약 교수 신분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사실이 사회적으로 드러날 일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제가 단순한 ‘오해’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 일들이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의 선진국이라는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 [정체성과 폭력: 운명이라는 환영(Identity and Violence: The Illusion of Destiny)]은 이렇게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왜곡, 그로 인한 환영(illusion)을 다룬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정체성이 세계적 폭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파헤치는 책이다. 미국 W.W.노턴 출판사의 ‘우리 시대의 이슈’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2006년 출판되었는데, 아마르티아 센이 이 책을 썼으며, 공교롭게도 헨리 루이스 게이츠는 이 시리즈의 총 기획자다.
논점1. 세계적 폭력의 배경에는 정체성의 갈등이 있다
정체성과 폭력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부룬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수단 등등, 폭력과 전쟁의 야만...이 휩쓴 세계 분쟁 지역의 면면을 살펴보면, 민족 정체성이나 종교 정체성, 또는 민족과 종교가 결합된 종교적 민족성(religious ethnicity)의 갈등이 폭력으로 분출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대량 학살이 있었던 르완다에서 수도 키갈리에 사는 한 후투족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그는 후투족일 뿐 아니라 키갈리 시민이자 르완다인이고 노동자이자 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많은 정체성 중 그는 자신을 후투족으로서만 바라보도록 압력을 받고 투치족을 살해하도록 선동되었을 수도 있다. 그 투치족이 자신들과 같은 키갈리 시민이자 르완다인이고 노동자이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적당히 선동되고 조장된 한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다른 이들을 잔인하게 폭행하고 살인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분파주의적 증오가 적극적으로 조장되면 들불처럼 번져 나갈 수 있으며, 이렇게 야만적으로 조작된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논점2. 우리의 정체성은 불가피하게 다원적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그 모든 집단에 속해 있다. 국적, 주거지, 젠더, 계급, 직업, 문화, 정치관, 음악 취향 등등 이런 다양한 집합체는 우리에게 각각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개인적으로 맺는 교제와 친분 관계로도, 심지어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다원적일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어느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개인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수많은 정체성 중 어느 하나를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라거나 심지어 우리의 운명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긍지를 느끼기도 하고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지역에 사는 이웃이나 같은 공동체 구성원, 같은 종교 신도 등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할 때, 정체성 의식은 우리의 연대감을 풍부하게 만들어 서로를 위해 많은 일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집단에 대한 강한 소속감이 다른 집단과의 거리감과 분리됨의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정체성 의식이 타인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많은 사람을 단호히 배제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는 종교가 이슬람교라서 ‘무슬림’으로 불리는 한 개인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를 바라보며 은연중에라도 무슬림 정체성을 그의 유일한 정체성으로 생각할 때, 그의 국적이나 취향, 사회적 지위, 문화적 태도 등은 모두 배제되고 그는 종교와의 관련성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일차원적인 존재가 된다. 이렇게 인간 정체성의 다원적 성격이 무시되고 ‘단일의 정체성’만이 고려될 때 ‘인간의 축소화’는 불가피하다. 이 책의 주제는 이러한 인간의 축소화가 가져오는 끔찍한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다.
논점3.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센은 이렇게 정체성을 단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에 세계 지성계의 명망 있는 학자들조차 동조하고 있다며 개탄한다. 그중에서도 공동체의 정체성을 최고의 가치라고 간주하는 공동체주의자들과, 세계 인구를 ‘문명권’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손쉽게 분류해 버리는 완고한 문화 이론가들을 지적한다. 특히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문명 충돌론’이 기본 전제에서부터 잘못되었음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냉전 이후 세계의 갈등을 문명 간의 대결로 풀이한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9·11 이후 특히 더욱 주목을 받았다. 헌팅턴은 세계 인구를 “서구권”, “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 “중화권” 등에 각각 소속된 것으로 분할한다. 센은 이러한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에는 ‘문명은 정말 충돌하는가?’를 따져 보기도 전에 이미 난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세계의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방식을 뒤로한 채 사람들을 주로 문명의 구성원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을 단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충돌한다’라는 옹호 진영이나 ‘문명은 충돌하지 않는다’라는 비판 진영 모두, 문명 공동체라고 하는 단일의 정체성에 따라 세계 인구를 분할하는 독보적인 범주화에 기본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셈이다.
헌팅턴은 또한 인도를 힌두 문명권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헌팅턴은 인도가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무슬림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경시했다.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약 1억 4,500만 명으로, 헌팅턴이 이슬람권으로 분류한 거의 모든 나라보다 훨씬 많은 무슬림이 인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센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상호 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인도의 예술, 문학, 음악, 영화, 음식 등을 이해하려는 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인도의 비힌두교 집단에 무슬림만 있는 것도 아님을 지적한다. 시크교도와 자이나교도 역시 존재감이 크고, 중국이 불교 왕국으로 칭했을 정도로 인도는 1천 년이 넘도록 불교 국가였으며, 인도에는 영국보다도 기독교 공동체가 더 먼저 생겼다. 오늘날 인도 공화국은 총리가 시크교도이며 집권 여당의 의장이 기독교도다. 또 2002~2007년에는 무슬림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러한 점들은 인도를 싸잡아 힌두 문명의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보여준다.
논점4. 이슬람은 불관용의 종교인가?
최근의 문화 분석에서는 종교적 소속에 따라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센에 의하면, 이 또한 인간을 단지 종교라는 하나의 소속 관계(affiliation)에 의해서만 파악하려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나, 그와 연결된 테러리즘에 대응하려는 서구 정치인들 모두가 무슬림을 그가 가진 다른 다양한 정체성은 모두 무시한 채 이슬람교도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진 존재로 바라본다. 특히 9·11 이후 이슬람교를 불관용의 종교이자 테러리즘과 연관된 종교로 바라보는 시선이 확대돼 왔다.
① 관용의 여부로 이슬람교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이슬람교는 삶의 수많은 영역에서 무슬림의 책임 있는 선택을 인정하고 있다. 즉 같은 무슬림이라도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나 서구에 대한 태도 등등 다른 면에서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단에 대해서도 어떤 무슬림은 대결적 태도를 취하고 어떤 무슬림은 철저히 관용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며, 어느 누구도 순전히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슬림으로서의 지위를 잃지는 않는다.
센은 16~19세기에 인도를 통치한 이슬람 왕조인 무굴 제국의 두 황제의 사례를 든다. 17세기 후반 무굴 제국 황제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일반적으로 다소 관용적이지 못한 황제로 간주된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백성에게 특별세를 부과하기까지 했다. 반면 그의 증조부인 16세기 후반의 아크바르는 종교적 관용을 지극히 지지하는 황제였다. 아크바르는 “어느 누구도 종교 때문에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되며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종교로 개종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국가의 공식 의무로까지 채택했다. 아크바르는 자유로운 선택과 열린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또한 주류 무슬림과 힌두 사상가들뿐 아니라 기독교도, 유대인, 파르시인, 자이나교도,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 포함하는 주기적인 토론을 개최했다. 아크바르의 관용은 무슬림들의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그가 훌륭한 무슬림이었다는 사실은 비판 세력마저도 부인할 수 없었다.
② 종교에 초점을 맞춘 정치적 접근은 테러리즘의 해소에 방해가 된다
센은 우연히 무슬림이 된 한 개인이 가지는 다원적인 정체성과, 그 개인의 이슬람 정체성, 이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이슬람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도 해당된다. 평화와 관용의 지지자와 전쟁과 불관용의 지지자 모두가 어떠한 모순도 없이 동일한 종교에 속할 수 있고 그들 나름대로는 진정한 신자일 수도 있다. 한 개인의 종교적 정체성의 영역이 개인의 이해와 소속 관계의 다른 모든 측면을 지배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이슬람 테러리즘’이란 것을 다룰 때는, 이슬람교 자체가 모종의 강력한 대립적 호전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세계 지도자들 중에는 “진실한 무슬림”이라면 관용적인 개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온건하고 진실한 이슬람의 목소리”에 호소해 온 이들이 많다. 그러나 대립과 관용에 대해 어떤 믿음을 견지하느냐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무슬림들이 매우 상이한 입장을 취해 왔음을 볼 때, 대립과 관용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의거해 “진실한 무슬림”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센은 오히려 정치인들이 이렇게 종교에 중심을 둔 접근을 한 결과, 비종교적 제도와 운동의 중요성은 격하시킨 반면, 종교적 권위의 목소리는 보강하고 강화해 왔음을 지적한다. 종교와 관련된 정체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체성을 간과하는 것은 종교적 분파주의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데 방해가 되며, 전 세계적 테러리즘을 극복하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만드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센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전 세계 지도자들이 현재보다 더 명료한 사고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다중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종교적 소속 관계를 넘어서는 사고를 기대하는 것이다.
논점5. 서구 세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서구화(Westernization)’에 대한 저항이 세계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 저항은 ‘서구적인 것’을 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멀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센은 서구적으로 보이는 것들 중 전적으로 ‘서구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서구에 대한 의식, 혹은 서구적이라고 ‘주장된’ 것에 대한 의식이 고착화된 것은 식민주의 역사에서 그 원인을 일부 찾을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는 피지배 국가나 민족을 정치적으로 억압한 것뿐 아니라 개인에 대해서도 서구에 사로잡혀 있는 풍조를 낳았다. 일부 사람들은 서구를 맹종적으로 모방하고 찬양하는 반면, 일부는 서구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센은 이러한 식민화된 정신(colonized mind)과 찬양이든 분노든 어떠한 형태의 서구에 대한 집착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나 조상들을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왜곡한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로부터 비롯된 분개가 오늘날 한 개인의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부당할 수밖에 없다.
식민화된 정신은 외래적인 식민지 권력과의 관계에 기생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센은 이렇게 식민화된 정신을 기초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 곧 “반발적 자아 인식(reactive self-perception)”의 본질이 현대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나 ‘개인의 자유’ 같은 세계적인 개념이 ‘서구’의 관념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었고, 그 때문에 그러한 개념에 대한 불필요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또 세계의 지성사와 과학사를 서구만의 역사라고 독해하는 데 기여했으며, 종교 근본주의의 성장과 국제적 테러리즘까지도 뒷받침해 왔다는 것이다.
①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것인가?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서구적인’ 것이라는 믿음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투표와 선거가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자주 연결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민주주의가 ‘서구적’ 본성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비약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당시에 오늘날의 서유럽 지역을 점령했던 게르만족 후손들에게보다는 고대 이란인이나 인도인, 이집트인 들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또 그리스의 ‘선거에 의한 통치’ 경험이 그리스와 로마의 서쪽에 있는 나라들, 즉 오늘날의 프랑스나 독일, 영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 반면, 당시 이란과 박트리아, 인도 등 아시아의 몇몇 도시에서는 의회와 민회 등을 선출하는 등 시정(市政)에 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한 역사가 있다. 또한 민주주의가 곧 ‘공공에 의한 이성적 추론(public reasoning)’과 관련된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토론에 의한 통치’는 고대 그리스뿐 아니라 몇몇 다른 고대 문명에서도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 왕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였던 불교 대회를 개최했으며, 공적 토론의 규칙을 최초로 체계화하고 이것을 경전으로 편찬해 보급하려고 했다. 또 604년에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가 섭정으로서 공포한 ‘17조 헌법’에는 “중대한 문제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다수의 토론이 있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는 13세기에 승인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보다 600년이나 빠른 것이다. 센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 서구는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근대의 제도적 형태의 민주주의는 세계 어디에서든 비교적 새로운 것이지만, 공공의 참여와 공공 추론 형식 면에서의 민주주의 역사는 전 세계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② 아시아적 가치의 옹호도 서구 강박의 형태다
센은 비(非)서구 지역의 반발적 정체성을 명료하게 표현한 것으로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의 옹호를 주목한다. 아시아적 가치는 동아시아를 옹호하는 이들이 자유와 권리 사상의 역사적 수탁자라고 주장하는 서구에 대한 반발로서 제시한 개념이다.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의 탁월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서구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구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대신 아시아는 수양과 도리를 소중하게 생각해 질서 있는 행위와 수양된 품행을 고수함으로써 서구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시아적 가치의 대표적 옹호자인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는 “사회와 정부에 대한 서구의 개념과 동아시아 개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는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이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1993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회의에서 중국 외교부장은 아시아적 우선순위에서는 “개인은 자신의 권리 이전에 국가의 권리를 먼저 내세울 것”이 요구된다는 명제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까지 했다.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있다는 리콴유의 독자적인 주장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리콴유의 일반화는 그 정당함을 입증하기 어렵다. 리콴유 및 아시아적 가치 옹호자들의 진단은 분명 자유와 권리의 당연한 본고장임을 주장하는 서구에 대한 반발적 대응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서구의 주장에 도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렇다. 우리는 자유와 권리라는 서구 개념에 크게 이바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서구에 응수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센은 이렇게 아시아적 가치의 반서구적 수사는 변증법적 의미에서 서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③ 테러리즘의 서구 의존성
센은 현대 사회의 일부 비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이 반서구적 성격을 강하게 보임으로써 사실상 서구 의존성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비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은 서구의 관념에 한결같이 반대하는 가치와 우선순위를 제시한다. 센은 오늘날 비서구인들 중에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타자(the other)’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철학자 아킬 빌그라미(Akeel Bilgrami)의 논의를 끌어들인다. 비서구인들의 자기규정에는 이러한 타자성(otherness) 비슷한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센은 가장 급진적인 반서구 근본주의 운동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타자’로 이해하는 반발적인 신념 체계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운동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형태의 근본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센은 무슬림에 의한 세계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던 과거(7~17세기)에는 무슬림들이 스스로를 ‘타자’로 정의할 필요가 없었지만, 서구가 근본주의 관점의 정치 무대 중심에 자리하게 되면서부터 그러한 자주적인 관점에 어떤 이탈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렇게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가 서구에 기생하고 있을진대, 미국이나 유럽을 겨냥하는 테러리즘은 서구에 더더욱 의존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누군가의 생명을 서구를 약화시키는 데 바치거나, 서구에서 상징성이 있는 유명 건물을 폭파하는 데 바치는 것은 서구에 대한 강박 관념이 다른 모든 우선순위와 가치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논점6. 문화적 일반화는 위험하다
우리의 정체성 의식과 우리가 속한 집단과의 소속 관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로 문화적 배경이 있다. 문명이나 종교도 그렇지만 국민적, 민족적, 인종적 집단에 대한 문화적 일반화들 또한 인간에 대해 제한적이고 궁색한 이해를 보여줄 수 있다. 문화적 일반화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고착시키는 데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대중의 신념이나 비공식적 의사소통에서 많이 발견된다. 문화적 일반화로 인해 고착된 맹목적이고 비틀어진 신념은 인종 차별적인 농담이나 민족 비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고정 관념은 그러한 편견이 나오게 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변하게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게 보통이다.
문화적 편견은 단순한 말장난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1840년대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영국 정부의 대처에도 문화적 편견이 모종의 역할을 했다(당시 아일랜드는 영국 국왕이 임명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영국의 빈곤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변화와 부침 탓으로 돌려진 반면, 아일랜드의 빈곤은 영국 통치의 잘못이 아니라 아일랜드인의 게으름과 무관심, 어리석음에 기인한 것이라는 관점이 영국에서 널리 견지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임무”는 “아일랜드의 곤궁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국민을 개화시키고 인간처럼 느끼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센은 문화를 사회적 난제들을 결정짓는 완전히 독립적이며 불변적인 요소라고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문화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독보적으로 의미 있는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일한 문화 환경 내에서조차 수많은 변종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문화는 균일한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문화는 사회적 지각 및 행동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들과 상호 작용하기에, 다른 영향력들에서 독립해 있는 고립된 힘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논점7. 세계화에 대한 거부보다는 더욱 공정한 분배를 생각하자
이 책에서는 오늘날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 대해서도 논한다. 센은 오늘날의 세계를 “눈부시게 풍족하면서도 동시에 참혹하게 피폐하다”라고 표현한다. 즉 현대 세계는 전례 없이 풍요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무시무시한 빈곤의 세계이자 끔찍한 박탈(deprivation)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센은 상이한 사람들에게 기회가 엄청나게 불균등하게 주어지고 그들의 생존권이 박탈되는 것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제도의 실패가 아닌 ‘세계화의 형벌’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세계화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화 논쟁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세계적 정체성의 본질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센은 혜택받지 못한 불우한 이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반세계화” 저항 운동가를 비롯한 세계 도처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세계적 정체성 의식이 존재하며 세계 윤리에 대한 관심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정체성 의식이 국적이나 문화, 공동체, 종교의 경계를 초월해 확장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인 불공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도록 해주는 “매우 포괄적인 소속 관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센은 세계화 비판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세계화된 도덕 운동일 것이라고 말한다.
① 세계화는 서구의 저주인가?
보통 세계화는 방송 토론이나 수많은 학술서에서 모두 서구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세계화 현상에 대해 낙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계화를 서구 문명이 세계에 공헌한 것으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산업 혁명이 서구의 생활 수준에 엄청난 향상을 가져왔고 이러한 성취들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으므로 세계화는 세계에 대한 서구의 선물이라는 관점이다. 반면, 세계화의 부정적인 산물들 또한 서구의 탓으로 돌리고 세계화를 서구 제국주의의 속편으로 이해하는 진영도 있다. 센은 “세계화는 정말 새로운 서구의 저주인가?”라는 질문에, 세계화는 반드시 서구적이지도 않고, 서구의 저주 역시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화는 수천 년에 걸쳐 여행과 무역, 이주, 문화적 영향력의 전파, 과학과 기술을 포함한 지식의 확산을 통해 세계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이러한 세계적 상호 관계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진보에 매우 생산적인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세계화 행위는 서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구와는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기 1000년경을 즈음해 과학과 기술, 수학적 지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당시 그 확산의 진원지는 비서구 지역이었다. 2~6세기에 인도에서 고안되어 발전한 이래로 아랍 수학자들이 널리 사용했던 10진법 체계라든지, 인도의 아리아바타, 바라하미히라, 브라마굽타, 아랍 수학자 알콰리즈미 같은 뛰어난 지식인 집단의 수학 및 과학 성과들이 10세기 후반 유럽으로 유입되었고(‘알고리즘’이나 ‘사인(sine)’ 같은 수학 개념이 모두 이때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유럽을 근본적으로 혁신시켰던 과학 혁명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페인, 미국, 멕시코 등지에 있는 ‘아세키아(acequias)’ 형식의 관개 기술 역시 스페인이 무슬림의 통치를 받던 시절에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중동의 기술을 끌어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서구 고전들 중에서는 아랍어 번역본을 통해서만 보존될 수 있었던 것들이 많았고, 10~12세기에 대부분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신기관(Novum Organum)](1620)에서 문명의 3대 요소로 들었던 인쇄술, 화약, 나침반도 모두 중국의 공헌이었다. 세계화 행위자들의 정체성을 표현하자면, 그 정체성은 오로지 서구적이지도, 지역적으로 유럽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반드시 서구의 지배와 연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고와 관습의 세계화가 ‘서구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세계화라는 광범위한 표제하에서는 무수한 세계적 상호 작용들이 일어나고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문화적, 과학적 영향력의 확장에서 전 세계에 걸친 경제적, 사업적 관계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센은 세계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글로벌 비즈니스 관계를 거스르는 일에 그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생각과 지식의 움직임 또한 제거해 버리는 굉장히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단언한다.
② 경제적 세계화와 불평등, 공정성의 문제
그렇다면 세계적 불평등과 빈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반세계화 저항 운동가들, 특히 ‘경제적 세계화’ 반대 운동가들과 친세계화 옹호자들의 주장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 세계화 반대자들은 세계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것이 핵심 문제라고 주장한다. 반면 세계화 옹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고 점점 가난을 덜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가난한 이들이 세계 경제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부유해지기 때문에,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세계 경제에 참여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가, 아니면 더 부유해지는가?”의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센은 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의 쟁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편의와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세계 경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무역에 참여해 이익을 얻는 일부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은 특권층의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어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사실상 방치하는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에 참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좀 더 부유해진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 상호 관계의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센은 현재 세계화의 이익 분배가 세계화가 없을 때와 비교해 모든 당사자에게 ‘이익이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대신 현재의 이익 분배가 다른 대안적인 이익 분배에 비해 ‘더 공평한 분배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덜 불균등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이 실질적으로 더욱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하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국내외적 제도에 어떤 것이 있겠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 빈곤, 굴욕의 감정과 보복적 폭력의 관련성
종교와 세계적 폭력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면, 극도의 빈곤이나 불평등에서도 폭력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빈곤 퇴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빈곤을 없애면 정치적 분쟁과 소란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극도의 가난함은 기존의 법률과 규칙에 도전하도록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빈곤이 반드시 폭력 행위의 발단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빈곤은 경제적 허약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무기력을 수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극심하고 광범위한 고통과 참상이 있을 때는 대체로 평화와 침묵이 동시에 존재한다. 실로, 정치적 폭동이나 내란, 또는 집단 간 충돌이 없었음에도 수많은 기근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1840년대 대기근 시기는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벵골에서는 1942년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었지만 1943년 벵골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오히려 법과 질서가 붕괴되지 않았다.
센은 기근과 박탈의 효과들이 사라지고 난 뒤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당함에 대한 의식은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불만을 키울 수 있으며, 극빈과 황폐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과 기억은 폭력을 발생시키는 데 호출되어 이용될 수 있다.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은 평화로운 시기였지만, 당시 부당함의 기억과 정치적, 경제적 멸시에 대한 아일랜드 사회의 비통함은 150년 이상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폭력으로 특징짓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고 진압하는 것은 당장에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 이득을 능가하는 광범위한 영향을 초래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느낄 부당함의 감정은 (상대편에서 보았을 때) 폭력적인 “보복”으로 여겨지는 일에 자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감정으로 남는다. 센은 오늘날 테러리즘의 지도자들이 기존의 세계 체제가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되는 이러한 부당, 부정, 굴욕의 감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당장은 테러리즘을 양성하지는 않아도, 테러리스트 캠프에서 보병을 충원하는 일을 더욱 쉽게 만들어 주는 토대가 될 수는 있는 것이다.
다른 때는 평화를 애호하는 주민들이 테러리즘에는 관대한 것은 특히 세계적인 사회적, 경제적 진보에 뒤처져 부당하게 대우받았다는 의식이 있는 곳에서, 혹은 과거에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은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특이 현상이다. 세계화의 혜택을 좀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은 테러리즘의 총알받이 병사들의 충원과 테러리즘을 관용하는 전반적인 분위기 형성, 이 두 가지를 모두 막는 장기적인 예방적 조치에 기여할 수 있다.
논점8.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적 상호 작용이 잦아지고 광범위한 이주가 이루어지며 상이한 문화의 다양한 관습들이 서로 자리를 마주하게 되면서 다문화주의가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센은 정체성 관념 및 세계의 폭력과 정체성의 관계를 논하는 이 책의 주제와 다문화주의의 본질과 함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다문화주의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작용과 연관되는데, 이러한 개인의 문화적 배경이란 그 개인의 공동체적 정체성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센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 우연히 속하게 된 공동체의 전통(특히 종교)에 따라 범주화되어야 하는가? 즉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닌 그 정체성에, 자신의 정치관이나 직업, 계급, 젠더, 언어, 학식, 사회관계 등 다른 소속 관계들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자동적으로 부여해야 하는가?” 센은 이와 같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가 다문화주의의 핵심 쟁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 다문화주의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센은 영국의 경험에 각별히 주목한다. 영국은 1981년 런던과 리버풀에서 인종 폭동을 겪은 이래로 인종 통합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영연방 출신으로서 영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영국 시민권이 없더라도 즉시 영국에서 완전한 선거권을 가질 수 있게 했으며, 의료와 교육, 사회 보장에서 이주자들을 차별 없이 대우해 내부적인 통합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럼에도 2005년 7월 7일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란 이민 2세대 무슬림 네 명이 런던에서 자살 폭탄 공격을 자행해 시민 52명이 죽는 완전히 자생적인 테러리즘을 겪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는 영국식 다문화주의 모델이 위기에 처했다는 취지의 논평을 냈다. 센은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다문화주의가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문화주의가 어떤 특정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문화주의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plural monoculturalism)’를 구분해야 함을 역설한다.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은 실제로는 대개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위한 구실이라는 것이다.
센이 말하는 이 구분의 핵심은 ‘상호 작용’의 여부다. 두 가지 양식이나 전통이 존재하더라도 서로 만나는 일 없이 나란히 공존한다면 그것은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보수적인 이민자 가정의 젊은 여성이 영국 남성과 데이트를 하러 나가려 한다면, 이는 분명 다문화적 마음에서 발원된 것일 테다. 반면, 그 여인의 보호자들이 그 외출을 제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다문화적 조처가 될 수 없으며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에 기여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이 경우 자기 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문화적 보수주의가 문화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문화를 고립시키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국가를 종교나 공동체의 연합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다민족 영국을 “관심과 애정의 공동 연대감과 집단적 존재 의식을 통해 함께 유지되는 문화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이해하는 ‘연합주의적’ 관점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센은 사람들을 단지 그 사람의 종교적 소속 관계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없듯이, 다민족 국가인 영국도 ‘민족 공동체들의 집합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한 개인이 영국이라는 국가와 맺는 관계가 그 사람이 태어난 가족이나 공동체의 문화를 통해 매개되어야 하는 것인지 반문한다. 다문화주의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 또는 문화적 정체성보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직업적 책임감, 학문적 신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센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러한 편협한 접근이 최근 영국의 공식 정책의 일부가 되어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특히, 영국 내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기존의 기독교 학교에다 무슬림, 힌두교, 시크교 아이들을 위해 신규로 고안된 새로운 종교 학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국가 정책을 언급한다. 센은 이런 새로운 종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곧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성적 추론과 선택의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 아이들을 종교라는 하나의 특정한 범주화 기준에 의해 엄격하게 분류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이 네 정체성이고 네가 갖게 될 정체성은 이게 전부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연합’ 관점에 의거한 영국의 이러한 정책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국 시민들을 시민 사회 속에서 서로 상호 작용하도록 권장하거나 시민으로서 영국 정치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권장과 장려가 그들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만 작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센은 이렇게 종파적인 방식으로 길러지고 교육받는 이들은 종파적 극단주의의 영향에 더욱 취약해질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장되는 편 가르기를 의도적으로 악용하려는 세력을 제지하기 위해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문화적 자유를 수반하는 다문화주의와, 신앙에 입각한 분리주의를 수반하는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단일성의 환영에 덜 감금된 세계를 꿈꾸며
오늘날 전 세계에 걸친 종파적 폭력은 과거 못지않게 잔인하고 환원주의적이다. 센은 그 야만성의 근저에는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적 혼동이 있으며, 이런 개념적 혼동은 다차원적 인간을 일차원적 생물로 바꾸어 버린다고 결론짓는다. 그와 같은 대결을 획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폭력적 목적을 위해 단일 정체성의 환영을 능란하게 양성하고 선동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른 교제 관계나 소속 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따라서 센은 우리 시대에 평화와 화합을 기대할 수 있으려면 인간 정체성의 다원적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다원성이야말로 단일의 분리 선에 의한 확고한 편 가르기에 저항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때 “환영에 덜 감금된 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어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적 추론과 선택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다양한 정체성에 상대적인 우선순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삶은 단순히 운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